공감 팩션 세계사

프랑스 혁명 전후 예술 사조 이해 -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체거봐라 2009. 12. 14. 15:34

여러분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시민들이 왕을 광장으로 끌고 나와 목을 잘라 죽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때 죽은 프랑스 왕이 루이 16세이고, 숙청된 부르봉 왕가의 문화 유행을 '바로크'라고 부릅니다. ‘바로크’ 문화예술은 귀족의 화려함을 특징으로 합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성주의자가 보기에는 바로크와 로코코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성주의자들은 이런 화려한 예술을 퇴폐적이라고 비웃었습니다. ‘바로크’, ‘로코코’라는 말 자체가 비웃음이 섞인 말이지요. ‘삐뚤삐뚤’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바로크풍의 예술 작품에서 느끼는 미적 특질을 우아미라고 할 수 있는데 ‘우아하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 나빠할 사람 별로 없습니다. 조롱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우아(優雅)의 優(뛰어날 우)는 요즘 말로 하면 ‘스타’라는 뜻을 갖고 있는 글자이니 기분 좋은 말인 게 분명합니다. 優는 사람(人)과 (憂 근심 우)가 결합된 글자이지만 憂를 근심으로 풀면 안 되고 여기서는 ‘춤추는 배우’로 봐야 합니다. 그러니 優를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스타’로 이해하면 딱 맞을 겁니다. 참고로 憂(근심 우)는 가면(頁 머리 혈)과 夂(뒤져올 치)가 결합한 夏(가면을 쓰고 춤춘다는 의미)에 마음(心)이 결합한 글자입니다. 춤을 추는 배우의 명연기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니 ‘근심’이라는 의미로 발전한 것입니다. 雅(맑을 아)는 음을 나타내는 (牙 어금니 아)에 새(隹 새 추)가 결합한 글자로 원래는 새의 이름이었습니다. 당연히 아주 예쁜 새이지요. 그러니 우아(優雅)하는 말은 ‘아주 멋있다’는 의미를 갖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크 시대의 이런 아름다움을 왜 조롱하게 되었을까요?

 

바로크 시대의 문화예술이 왜 화려함을 추구했는지 나중에 왜 조롱거리가 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그도 그럴 만하구나 싶은 게 있습니다. 바로크 시대상을 들여다보려면 영화 [왕의 춤]을 보시기 바랍니다. 프랑스 절대왕정을 이룬 루이 14세의 삶을 그리고 있는 영화입니다. 루이 14세 집권기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자면 한참 이런 저런 얘기를 해야 하는 만큼 여기에서는 바로크풍이 왜 생겨났는지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것만 다루도록 합시다. 이 시대는 중세의 종교적 세계관이 많이 약화된 때입니다. 그 대신 세속 왕권이 급격히 강화된 때이지요. 루이 14세는 지방의 봉건 귀족을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불러들여 아주 화려한 유행 풍조에 휩쓸리도록 했습니다. 왕인 그 자신이 발레 공연 무대에 서기도 했으니 그의 예술 취향은 놀라울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문화 풍조를 조장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극대화 했으며 그에 따라 지방 귀족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당연히 존경을 받을 수 없게 되고 점차 지도력을 잃게 되었지요. 나중에는 집중된 권력이 부패하게 되고 민중의 불만은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된 것이지요.

 

부셰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와토 [조망]

 

프로고나르 [그네]

 

위의 세 작품은 로코코풍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한 눈에 봐도 화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퇴폐적이기까지 하지요. 귀족들의 이런 화려한 문화가 당대의 지식인과 서민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짐작하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위의 작품이 어떤 측면에서 다른 예술 작품과 느낌이 다른지 잘 모르겠으면 바로크풍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고전주의 문화예술 경향을 살펴보면 됩니다.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고전주의는 쉽게 프랑스 혁명 정신을 문화예술에 구현한(드러낸) 유행 흐름이라고 보면 됩니다. 혁명 이전의 프랑스 귀족 계급의 미감(미적 감각)을 잘 표현한 로코코 풍을 배격하고 고대 로마의 기풍을 되살리는 새로운 흐름을 주도한 다비드는 로마시대의 숭고한 도덕성을 예술로 구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현인이나 영웅을 주로 소재로 택한 것은 바로 이런 신고전주의의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비드 [독배를 드는 소크라테스]

 

다비드는 독배를 드는 소크라테스를 그려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말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는 부르봉 왕조의 퇴폐적인 문화를 경멸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위대한 인간 존재를 회화로 보여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프랑스 혁명 정신을 전 세계로 펼칠 성스러운 전쟁을 이끄는 나폴레옹을 추앙(떠받듦)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그의 예술관을 고전주의라고 하고 고전주의 예술이 추구하는 미적 특질은 숭고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숭고(崇高)'라는 글자를 살펴보면 그 뜻이 분명해집니다. 崇(높을 숭)은 산(山)과 꼭대기(宗 마루 종)가 결합한 글자입니다. 高(높은 고)는 잘 알고 있는 글자이지요. 그러니 '숭고'라는 말을 '아주 높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숭고미는 아주 높고 위대한 존재에게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높은 존재가 모두 아름다운 건 아닙니다. 다음에 보게 될 나폴레옹을 그린 그림에서 고귀한 존재에 대한 다른 시각을 살펴 보도록 합시다.

 

 

다비드 [나폴레옹 대관식]

 

[나폴레옹 대관식]은 다비드 작품들이 표방한(내보인) 숭고미를 아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가로 10m에 가까운 그림의 크기만으로도 그 웅장함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과 다음에 살펴볼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황제 나폴레옹을 아주 기쁘게 했다고 합니다. 고전주의자이자 프랑스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실제로 혁명에 뛰어든 자꼬뱅 당원 다비드의 영웅 숭배적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다비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폴 드라로슈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아주 멋있게 황제한테 칭찬을 들었지만 많은 이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화는 프랑스혁명을 지배하고 있던 자유 평등 박애 사상이 실재 진행과정에서 얼마나 왜곡되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폴 드라로슈가 그린 그림과 비교해 보면 다비드가 얼마나 나폴레옹의 실재를 왜곡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위대한 존재에 대한 시각이 이렇게 다를 수 있는 건 참 놀라운 일입니다. 사람들이 왜 다비드를 조롱하고 비웃었는지 이해하려면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비드는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지만 프랑스 혁명기에 반혁명 분자들의 위협을 봉쇄하기 위해 공포정치를 추진한 급진 자코뱅당의 핵심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로베스 피에르, 당통, 장 폴 마라 등과 아주 가깝게 지내며 공포정치의 정당성을 붓으로 웅변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예술을 정치선전물이라 비꼬는 것은 바로 이런 사연 때문입니다.

 

 

    

다비드 [마라의 죽음]                                     폴 자크 에메 보드리 [샤를로트 코르테]

 

그는 공포정치를 밀어붙인 로베스피에르의 예술 각료를 맡아 ‘붓을 든 로베스피에르’란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마라의 죽음]과 같은 작품은 혁명에 대한 그의 열정적 지지를 단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바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그는 공포정치를 주도한 자코뱅파의 핵심 정치인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라는 반대파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혁명에 대한 이런 반발을 물리치기 위해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를 주도하고 다비드는 그의 학살에 동의한 사람입니다.

 

보드리가 그린 마라의 죽음과 비교해 보면 한 사건을 이렇게 다른 관점으로 볼 수도 있구나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라는 어떤 사람일까요. 혁명 정신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위대한 영혼이었을까요. 아니면 권력을 잃지 않으려고 반대자들을 무참하게 죽인 나쁜 사람이었을까요. 다비드는 그를 민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위대한 혁명가로 그리고 있습니다. 목욕을 하면서도 민중의 청원서를 검토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아주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상파 화가 보드리는 이 사건을 다르게 봅니다. 그는 마라보다 그의 가슴에 칼을 꽂은 암살자 코르테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는 살인자 코르테를 정치적 폭력을 선동하는 마라를 응징한 여성 투사로 그리고 있습니다.

 

마라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제대로 모르면서 그의 삶을 평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짐작하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시대의 프랑스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간편한 방법이 있습니다. 영화 [당통]을 보면 됩니다. 온건파 당통이 급진파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숙청되는 과정을 실감 나게 그리고 있습니다. 마라는 줄곳 로베스피에르 편에 섰던 사람입니다. 다비드도 그들과 정치적 동반자였습니다. 로베스피에르가 당통을 죽이고 민중의 비난을 사 실각한 뒤에는 다비드도 투옥되지요. 그런 그가 나폴레옹에 의해 발탁되고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무리하게 전쟁을 확대시키고 대러시아 전에서 패배하고 난 뒤에 권좌에서 쫓겨나자 그는 외국으로 망명을 해버렸습니다. 권력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활용한 사람이라는 비웃음을 살 만한 행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세 귀족의 부폐를 걷어낸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은 나폴레옹 왕정 복고로 변질되고 그에 따라 프랑스혁명 정신을 예술로 꽃피운 고전주의도 낭만주의와 인상주의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됩니다.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추구했던 다비드의 예술도 권력의 화신으로 비난을 받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