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씨네마

영화로 보는 문학 교실을 준비하며

체거봐라 2009. 1. 2. 22:10

오늘, 새해 인사차 경인교육대학교 총장님을 만나 뵈러 갔습니다. 임기가 한 100일 남았다고 하시면서 근래에는 병원에도 다니신답니다. 지친 모습이셨습니다. 저는 허숙 교수님께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교육계의 어른이시라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차분하게 가라앉는 톤으로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듣는 게 쉽지 않은 나이(마흔 다섯)인지라 여러 어른을 만나뵙고 말씀을 청해 듣는 일이 참 힘이 드네요. 피곤하지만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은 건 힘겹게 들은 말씀을 되세기지 않으면 금방 죄다 잊어버리는 게 아깝기도 하고 이렇게라도 독자에게 전해야 고달픈 하루가 헛되지 않을 것 같아서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오늘날 학교에서 전할 지식은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교육자들이 이 말에 크게 충격을 받지 않을 만큼 상식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제 학교는 필요 없다는 말이 됩니다. 학교가 필요 없다는 말은 교사가 필요 없다는 말이 되고요. 결론적으로 나는 이 사회에서 필요 없는 노릇을 하면서 국민의 세금을 축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말인데 이렇게 표현하면 좀 충격을 받을지 모르겠습니다. 필요 없는 걸 교묘히 포장해서 팔면 그게 범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중세시대에는 문자가 집적된 기록물이 곧 권력의 원천이었습니다. 문자로 전승되는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곧 권력이었지요(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원작으로 한 영화 [장미의 이름]을 추천합니다). 인쇄술의 발전으로 권력의 메카니즘이 크게 변동되었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웹에 의한 변동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식을 주고받는 방식의 변화에 의한 엄청난 사회변동을 겪고 있습니다. 학교는 더 이상 지식을 전수하는 곳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영상매체(대표적으로 TV)와 인터넷으로 전해지는 지식을 학교는 따라갈 수 없습니다. 앞으로 학교는 어떻게 될까요. 다 없어질까요?

 

저는 웹2.0시대에도 학교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냥 쌓여있는 정보는 쓸모있는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웹으로 엄청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지만, 사물을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지혜는 오히려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습니다. 아이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엄청난 정보를 잘 가려내어 유용하게 쓰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널려 있는 정보에 의해 소외되고 있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듭니다. 안내자가 없으면 원시림은 여행자의 생존을 위협할 뿐이듯이 쌓여 있는 정보는 아이들을 잡아 먹는 괴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21세기에 학교는 어떻게 남아 있을까요. 교사는 어떤 역할을 해야할지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1세기 교사는 정보의 늪을 횡단하는 안내자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정보를 소지하는 게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정보는 주변에 늘려 있으니까요. 정보를 맵씨 있게 가공하는 기술도 이젠 별로 필요치 않습니다. 교사는 상업매체의 기술을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도만으로 오지를 횡단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건 정서적 유대를 바탕으로 하는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학교는 정서적으로 공감하기 위해 모든 시간과 자원을 투자해야 한다고 봅니다. 교사는 학생들과 정서적으로 얽힐 때 비로소 존재 이유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근대 이후 합리주의가 모든 인간관계를 계약관계로 바꾸어 놓았는데, 이런 계약관계에 의한 합리적 사회 구성이 이제 한계에 다다르지 않았는지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고 봅니다. 합리적 계약관계가 효용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편으로는 유용하지만 이런 계약관계가 사람들을 기계처럼 만들어 버리고 나중에는 사회가 거대한 기계공룡으로 비대해지고 말아 늪이든 절벽이든 가리지 않고 앞으로만 굴러가다가 피괴되겠지요. 인류의 역사, 아니 생명의 역사는 이런 비대화와 파괴를 반복 경험했습니다. 더 멀리 가고 더 빨리 이동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 쏟아 왔는데 이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기 위해서라도 늦추고 멈출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다음 시간에는 아이들과 함께 정보의 바다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정보를 가려내기 위해 어떤 안목이 필요한지 본격적으로 얘기해 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