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문명에 대해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몇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된다. 이집트 문명권은 어떻게 3000여 년이라는 엄청난 시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는지, 아직도 그 용도를 분명히 알 수 없는 거대한 건축물을 왜 만들었는지 하는 의문을 아니 가질 수 없다. 피라미드가 범람기의 공공사업이었다는 가설은 이 두 가지 의문에 대해 해답을 말해 준다. 오랜 문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파라오의 공공정책이 친환경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집트 왕조는 나일강의 범람에 대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엄청난 규모이면서 정교하기까지 한 파라미드를 건축할 수 있는 사회가 나일강의 범람을 통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이집트 사회는 왜 강의 범람을 막을 제방을 만들지 않았을까.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관계농업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관계농업으로 인한 토양의 황폐화로 사멸했을 수도 있다는 유력한 학설이 있는데 이집트는 메소포타미아와는 정반대의 방식을 택했다. 그들은 강물의 범람을 막지 않고 그냥 두었다. 농경지가 물에 잠기는 4개월 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농민들은 고립되었다. 전국가적인 엄청난 위기 상황이 매년 벌어지는데도 그들은 범람을 방치하다시피 했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강의 범람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신의 축복으로 받아들였다.
나일강의 유역 [NHK 문명의 탄생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차이는 강물을 다루는 이 현격한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관계농업은 물을 가두어 두게 되면서 토양의 염도가 점진적으로 높아지고 결국 황폐화 될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의 나일강은 매년 엄청난 규모의 토사를 하류로 흘려 보내 주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든다. 이디오피아 고원지대를 출발한 나일강은 수단을 거치면서 이집트로 흘러드는데 강물은 밀림지대의 영양분을 하류로 흘려보내 이집트의 비약적 농업 발전을 가져온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이런 자연의 축복을 잘 알았던 모양이다. 자연의 순리에 맞게 살았다는 얘기이다. 범람기의 경제적 위기는 대규모의 토목공사로 극복했다. 이집트 왕조는 자신들의 치적 자랑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피라미드와 신전의 건축을 이용한 것 같지 않다. 공황기의 뉴딜정책과 흡사한 것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자연 순응과 정책의 효율성이 이집트 문명이 오랜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인 것이다.
범람의 규모를 보여주는 위성사진 [NHK 문명의 탄생 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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